Drive it like you stole it, 훔친 것처럼 달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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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 it like you stole it, 훔친 것처럼 달려!(1)

정아경(수필가)

정아경 홈페이지용.jpg

정아경(수필가)

 

오픈 두 시간 전, 백화점 입구를 뚫어져라보며 우회전을 하고 있다. 대여섯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음이 분주해졌다. 지하 4층에 주차를 하고 비상구 계단을 잰걸음으로 올라갔다. 백화점 정문 앞에는 굵은 철문이 내려져 있지만 입구 구석진 곳에는 가느다란 줄이 길어지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나보다 한 걸음 먼저 도착했다. 그녀 다음이 내 순서다.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열 번째는 되는 것 같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젊은 엄마 둘이 아기 두 명을 데리고 나의 오른쪽에 다음 자리를 잡았다. 그 다음에는 아가씨 둘…. 오픈까지는 두 시간은 족히 남은 시간, 길어지는 줄에 묵언의 규칙이 지켜지고 있었다.
커플인 젊은 남녀는 다소곳이 속닥이고 있다. 프로포즈나 결혼 예물로 사러 온 것이 분명하다. 저들의 속삭임에 얼마나 많은 희망들이 부풀어 있을까 보기 좋다. 혼자 온 아가씨는 휴대폰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그녀의 상념에 오늘 이 시간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작년 스타벅스에서 프리퀀시 사은품으로 주었던 간이의자에 앉은 여자의 뒷모습은 당당했다. 스타벅스와 샤넬, 일맥이 상통한다. “엄마~엄마~” 후렴구처럼 엄마를 부르는 아기들과 눈높이 대화를 주고받는 엄마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적막을 채우고 있다. 8차선 출근길에 차량들이 늘어나고 햇살은 한층 밝아졌다. 젊은 엄마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라며 동행에게 묻고는 스스로 대답한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 같아 보이겠지? 그 표현에 나는 피식 웃었다. 묘한 동질감을 마스크 속에 감춘다.
몇 번의 헛걸음은 제법 노하우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샤넬 백을 메고 거울 앞에 설 나를 생각하며 한껏 멋을 내어서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기다리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금 나는 편한 바지에 운동화 차림이다. 2시간의 공백을 채울 나는 에코백 안에 책과 메모지까지 챙겼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펼쳤다. 책갈피가 꽂혀있는 부분을 펼치니 16장이었다. 프랑스 곤충학자들 모임에 육십 대 체코인이 등장한다. ‘문 입구에 방문객 명부가 놓인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고 자기만큼이나 쓸쓸해 뵈는 아가씨가 한 명 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누구나 어색한 공간에 자신을 두면 저런 느낌일 거라 생각한다. 책상 위에서 읽을 때는 느끼지 못한 문장의 의미가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깊이 이해하는 아이러니라니….  몹시도 내가 어색하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마음속 깊은 욕망은 꼭 갖고 싶다는 열망으로 그 순간의 부끄러움을 견디게 했다. 몇 쪽을 더 읽는다. 68쪽 ‘우울한 긍지’라는 2어절의 단어가 훅 들어온다. 우울한 긍지 이건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마치 지금의 나의 모순을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나는 ‘우울한 긍지’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촌스럽게 우울한 중년이 되긴 싫어 내뱉지 않던 단어 뒤에 긍지가 붙자 꽤나 그럴듯해 보인다. 마스크 속에서 나는 몇 번이고 두 어절을 읊어본다. 타당한 이유를 찾던 나에게 밀란 쿤데라의 ‘우울한 긍지’라는 단어는 근거가 되어줬다. 긍지는 결코 나의 우울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나는 우울한 긍지를 반 바퀴 돌려 긍지의 우울함으로 바꿔본다. 지금 나의 긍지는 어떤 우울을 품고 있나. 꼿꼿하게 버텨온 긍지 속의 우울을 이제야 알아챈다. 몰아냈던 우울은 이름 모를 곳을 부유하다가 샤넬매장 대기표를 기다리는 이 순간의 나에게 철썩 들러붙는다. 또 내쫓아버릴 나를 이미 간파한 것인지, 이번에는 긍지라는 동무와 함께.
생각이 깊어지는데 앞에서 우르르 일어선다. 오픈 30분전이다. 나는 책갈피를 꽂고 생각을 덮어둔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직원이 대기번호를 접수한다. 내게 부여된 대기 번호는 11번. 백화점 근처 스타벅스에는 줄을 섰던 그들이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 역시 커피를 마시며 백화점 정문을 응시한다. 백화점이 오픈되고 샤넬 매장을 구경하고자하는 줄은 점점 길어졌다. 먼저 번호표를 받고 커피를 마시는 나는, 그들의 다음 순서를 알고 있었다. 입장은 해도 물건이 없다는 비정한 현실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을….

<다음호에 계속>
 
작가 프로필
대구문인협회, 에세이스트 작가회, 북촌시사, 고령문인협회 회원
제7회 매원 수필문학상
수필집 : 『나에게 묻다』 『중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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