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물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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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물에 빠지다

정아경 (수필가)

정아경 홈페이지용.jpg

정아경 (수필가)

 

마음이 간지러워,
그곳이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나는 간지럽다고 했다. 친구는 간지러움이 전해진 듯 깔깔대며 암튼 특별했나보네,라고 답한다. 일상어에 익숙한 친구는 감정표현에 적극적인 나에게 ‘감성충’이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내가 하는 표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준다. 마음이 간지러워질 때가 있다. 배꼽 어디즘에서 생기는 것도 같고, 가슴 어디즘에서 머무는 것도 같은 그것은 이성을 무장해제 시키는 묘한 힘을 가진다. 그 묘한 마음의 파장을 표현할 길이 없어 감동이란 단어로 정의하지만 가끔은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뜨거우면서도 따끔하고, 서늘하면서도 쓰라린 묘한 그것에 지배당하고 보면 곧추세우느라 힘쓴 것들이 참 속절없다. 꿈만 꾸던 성 소피아 성당의 둥근 기둥아래 섰을 때도 그랬다. 많이 간지러웠는데 긁을 수가 없어 눈물 몇 방울이 조르르 흘렀다.
일상이라는 것은, 그것도 한 분야에 오랫동안 일하다보면 일의 전문성을 떠나 반복의 연속이다. 미련한 일상에 묻혀 사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수필가 P선생이다. 여러 작가들이 달성군의 명소를 밟아보고 수필로 써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기획에 함께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온전히 그녀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좋은 감정이 그녀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달성군청에서 만난 우리는 달성군의 명소 몇 곳을 걸어볼 참이었다. 기획자인 달성문협 회장님의 길안내는 행운이었다. 고향에 대한 짙은 애정만큼 고향의 명소와 유래, 고향을 지키고 알리기 위한 그의 노력이 절절했다. 대구와 고령의 중간으로만 인식되었던 달성은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손길이 닿지 않은 산딸기의 빨간 열매가 이정표처럼 선명했다. 늘어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난 오르막길을 걸으니 계단이 나왔다. 108개의 계단이다. 대견사 가는 길목이니 발 딛는 곳마다 불교의 흔적이고, 부처의 도량이었다. 108계단의 끝은 금수암 전망대였다. 대견사지 임도, 관기봉, 조화봉, 비슬산, 대구테크노폴리스를 둘러볼 수 있다는 망원경이 있었지만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방향도 잃고, 풍경도 삼킨 솜이불 같은 푹신한 자연의 품에서 부드러워지고 나긋해졌다. 나긋해지고 가벼워지니 자음과 모음의 조합도 무겁고 불필요한가보다 태초의 언어인 아~, 오우~ 라는 감탄사만 늘어놓았다. 같은 말들을 무한 반복하며 길을 안내하는 그를 따라 좁디좁은 바위틈으로 나아갔다.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사라질 듯 위태한 지형이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듯 나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숱하게 다녔다는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금수암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한다. 병이 낫고 싶어 금수암 물을 마시러 가는 자는 분명 쾌차할 수밖에 없다. 간절한 만큼 효험도 있겠지만 금수암까지 도달하기위해서는 건강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도전의 길이다. 높고 가파른 지형을 통과해야하는데 건강한 이에게도 아슬한 곳이다. 아슬한 지형을 통과하고 나면 거대한 바위틈에 신선이나 선녀들의 전용 샘일 듯한 금수암이 고요히 기다리고 있다. 금가루가 떠 있는 것도 같고, 송화가루가 뭉쳐진 것도 같은 금빛 샘은 매혹적이다. 영험한 기운이 도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금빛 물을 권했다. 비슬산 초입부터 108계단을 오르며 전망대에서 바위틈으로 내려가던 신비의 풍경이 마시는 물과 함께 몸과 마음에 적셔지고 새겨졌다. 갈증이 사라지는 것도 같고, 간지러움이 해소되는 것도 같았다. 영겁의 세월 동안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았다는 금수암은 바위가 로스팅 한 유일한 음료로 영원永遠을 떠오르게 했다. 바위의 묵직함과 숲의 우직함에 안겨 물을 마시자니 수 세기전의 그들과 현재의 나와 미래의 누군가와 이어진다는 믿음이 들었다. 자연이 내어 준 터전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원을 이야기하고 전설이 되어본다.
물끄러미 그 작은 웅덩이를 바라본다. 오래되고 깊은 비밀을 품은 샘은 여전히 금빛으로 고요하다. 시간도 공간도 무심해진다. 찰나의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 한줄기에 온 산이 출렁이고, 산까치의 날개짓 하나로 온 산이 깨어난다. 손바닥 만 한 햇살이 말을 걸면 비슬산은 제 속살을 활짝 열어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날선 것들을 무두질  해야 할 때 찾아가 볼 것이다. 마른 날이 지속되는 어느 날은 훌쩍 가 볼 것이다. 그곳은 감동이, 마음이 간지러워지는 곳이다. 가끔은 떠나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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