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경(수필가) 숙명! 살면서 숙명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운명은 자주 애용하는 단어이다. 운명이라는 단어는 복잡한 매듭을 한꺼번에 자르듯 해결의 실마리가 되곤 했다. 잘못된 선택이지만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운명은 합리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철석같이 믿고 싶은 인연 앞에도 운명은 관계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뒷담화의 은유처럼 쉽게 쏟아내고, 가볍게 소비하며 살았다. 가끔 힘겹고, 가끔 절망적이지만 운명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서 그럭저럭 여기까지 살았다. 하지만, 숙명...
정아경(수필가) 마음이 간지러워, 그곳이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나는 간지럽다고 했다. 친구는 간지러움이 전해진 듯 깔깔대며 암튼 특별했나보네,라고 답한다. 일상어에 익숙한 친구는 감정표현에 적극적인 나에게 ‘감성충’이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내가 하는 표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준다. 마음이 간지러워질 때가 있다. 배꼽 어디즘에서 생기는 것도 같고, 가슴 어디즘에서 머무는 것도 같은 그것은 이성을 무장해제 시키는 묘한 힘을 가진다. 그 묘한 마음의 파장을 표현할 길이 없어 감동이란 단어로 정의하지만 가끔은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
정아경(수필가) 지루해, 라는 친구의 문자를 읽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지․루·해․라는 문자의 배열이 참하다는 생각을 한다. 읽고도 답이 없자 뭐해? 라며 다시 묻는다. 뭐라고 답해야하나. 지루해, 라는 글자가 참해라고 해야 하나, 너랑 문자하고 있잖아, 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친구가 원하는 어떤 추상적인 문장 하나를 던져야 하나. 삶이 지루해, 다시 온 친구의 문자에 나는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지루한 것이 당연한 일상을 저토록 천착하며 표현하는 것은 친구의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는 투정이었다. 날마다 생기는 ...
서 상 조시인·소설가 지난호에 이어 어이가 없다는 듯한, 멍한 표정의 지부장이 헛것으로 보였다가 사라졌다.“이야! 민양 너, 배짱이 보통이 아니구나. 완전 장군 감이네.”주인언니는 사태를 감지하고는 정혜에게 슬슬 비벼대기 시작했다. 통닭을 시키고 맥주를 사와서는 온갖 제 삶의 이야기들만 쏟아내다가 정혜 옆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다음날 아침, 잠든 주인언니를 깨우지도 않고 정혜는 일찍부터 짐을 정리했다. 짐이래야 커다란 가방 하나뿐이었다. 화장을 연하게 하고 옷도 제일 점잖은 것으로 골라 입었다. 오늘 일자로 다방생활을...
서 상 조(시인·소설가) “넌, 아니! 희다방은 이제 영원히 끝이야. 그리고 너도 철창에 집어넣기 전에 사라져라. 야! 비서실장 이 새끼야, 군수실이 소나 개나 막 집어넣는 곳이야? 여기 미친년 이거 끌어내 임마.”“아뇨, 제 발로 나갈께요. 그리고 군수님, 협상은 결렬된 것으로 하고 철창도 지금 바로 제 발로 갑니다.”영문도 모르고 쩔쩔매는 비서실장과,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정혜의 태도에 분노와 걱정이 얽힌 군수의 표정을 두고 정혜는 유유히 밖으로 나왔다.경찰서는 군청과 담하나 사이였다.정혜는 정문의 의경에게 안내...
윤성희수필가 코로나19와의 전쟁을 한지도 딱 1년이 된다. 지난해 2월 23일 70여명의 회원들이 윷놀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대구 신천지교회 사태가 봇물 터지듯 하면서 온 나라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렇게 1년이란 세월을 넘나들 줄이야 짐작이나 했을까? 작년 이맘때 처음 사회적 활동을 금지할 때가 생각난다. 기껏해야 1주일이면 되겠지? 라는 생각에, ‘이참에 나의 몸과 마음을 조금 쉬어주자’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응했다. 그러던 중 1주일이 아닌 몇 주일이 지나가니 ...
유윤희(수필가) 미련이 많은 사람들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도로에 어딘가 어색함을 느낀 것은 지난 유월경 신천지 교회 소동이 점차 수그러지던 시점인가 싶다.물론 희고 검은 마스크를 쓴 군상들이 도로를 가득 왕래하는 그 자체가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 경우지만 그래도 왕래하는 사람들의 구성에 분명히 약간의 부조화를 느꼈다. 일상 와중에 그 부조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 적지 않은 날을 보낸 후 내 나름 그 원인을 찾았다. 그것은 나이가 든 양반들이 거리에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예전 ...
김년수(수필가/선산김씨 문충공파 종친회장) 우리나라에는 24절기가 있다. 그 중 소설(小雪)은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는 절기를 뜻한다. 특히 소설이 다가오는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바람이 세차게 불어 김포 사람들은 배를 운행하는 것도 삼가했다. 이 때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부른다. 손돌바람은 김포시에 위치한 묘소의 사연과 관련이 있다. 소설에 부는 손돌바람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조선왕 인조는 청나라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을 왔다. 지금의 김포에 살던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인조의 뱃길을 안내해주었...
정아경(수필가) 편지를 쓰고 있다. 편지지 위에 쏟아내는 문장은 딸의 부재를 매 순간 느낀다는 절절함으로 가득하다. 온 세상 행운을 모아 딸의 안전을 기원한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기원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나의 문장은 곡진하다. 신을 섬기는 선한 마음보다는 이기심이 더 많은 나의 기도는 늘 빈궁하고 간절한 순간에만 찾아온다. 필사(筆寫)하는 수도원의 거룩함이 편지지 위에서 재현된다. 자음·모음… 부디, 이 문장을 읽는 딸에게 힘이 되기를…….세계가 하나의 모바일 안에서 소통되는 시대에 딸은 전화, 카카오톡, SNS,...
정아경(수필가) 형이 생겼어요 가끔, 같이 사는 남자가 외로워 보일 때가 있다. 다섯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누나들이 있고, 한 여자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으며 홀어머니를 두고 있는 그는 여인국(女人國)에 난파된 걸리버처럼 이질적이다. 다행인 것은 그 남자의 성향은 지극히 남성 지향적이고 또한 스포츠에 열광한다는 점이다. 월드컵, 올림픽은 물론이고 각종 프로리그도 빠짐없이 챙겨본다. 야구선수에 대한 프로필이나 그들의 경력이나 중요 포지션은 해설가 수준이다. 응원도...
김상룡(수필가) 일요일 오후, 나는 매번 무채색이 된다. 문득 ‘의미’라는 단어가 끼어든다. 해석과 평가 사이를 줄타기에 앞서 나에게 의미란 매번 1,067m의 허들로 나타난다. 넘어야 되는 강박이 싫다. 오늘은 어지러운 세상 소식에서 멀어지리라 다짐하면서 해석과 평가가 필요 없는 채널을 돌렸다. 매번 화면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한국 청년이 적도의 나라 에콰도르를 소개하고 있었다.지루해진 여행 프로그램에 눈꺼풀이 무거워질 즘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인을 만난 듯 백년지기 친구를 만난 듯 ‘발타사’...
정아경(수필가) 따르릉 따르릉, 손만 내밀어 알람을 끈다. 연인의 품 같은 이불 속에서 떨쳐 일어나기란 쉽지 않다. 뭉그적대는 사이 또 울린다. 알람 간격이 10분이니, 10분이란 시간이 그토록 달콤할 수가 없다. 이제 일어나지 않으면 줄줄이 지각 사태가 이어진다. 새벽형인 나에게 아침잠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늘 힘겹다.알람이 울리지 않는 일요일이 며칠 남았는지 헤아리며 반수면 상태로 세수하고 쌀을 씻는다. 압력밥솥에 취사 버튼을 누르고, 전날 준비해 놓은 찌개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며 ‘일어나라, 밥 먹어라’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