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전화 주운 사람입니다. …네. 편의점에서 주웠어요. 학생이랑은 이미 통화돼서 학생이 폰 찾으러 오고 있어요. 여기는 부천이에요. 좀 멀죠… 하하 제가 집이 부천이라 … 폰을 주웠는데 아무리 편의점에서 기다려도 안 오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와 버렸네요. 학생이 오는 길에 지하철을 잘못 타서 천안 방면으로 가는 바람에 늦어졌다고 하네요. 원래 1호선이 헷갈리기 쉽잖아요. 부모님께 연락드리려고 해도 번호를 잊어버려서 연락을 못 했다고 만약 부모님 전화 오면 잘 좀 받아달라고 했어요. 슬슬 학생이 도착할 시간이네요,...
박진경일러스트, 웹툰 작가 “처음 술 먹은 거지?”“응.”“근데도 토할 정도로 마셨다고?”승호가 다시 한 번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변명처럼 들릴 말을 주절거릴 수밖에 없었다. “말렸는데… 너무 급하게 먹더라고.”“솔직히 말씀하세요. 얘랑 무순 관계예요?”“…내가 오늘 얘 술 셔틀이야.”“예?”“술심부름 용도로 편의점 앞에서 다짜고짜 잡혔어.”“그래서 거절하면 될 걸 굳이 고딩 여자 애 술심부름 할 겸 해서 같이 마신 거예요? 애가 꽐라가 되도록?”“나 꽐라 아니야.”“응, 너 꽐라야.”“내가 먹고 싶어서 내 의지로...
박진경(일러스트, 웹툰 작가) “난 최근엔 계속 야근하느라 집에 들어오면서 씻고 자기 바빴거든. 그래서 드라마는 죄다 놓쳤어. 드라마 이름이 뭐야?”“오후 정원이요.”“ 아, 그거 우리 과 여직원들이 재밌다고 난리던데.”“네, 재밌어요. 진짜루요.”“한 번 봐야겠네.”“꼭 보세요. 안 보시면 후회해요.”“알았어, 알았어, 이제 먹을까?”민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나를 따라 조심스레 눈앞의 잔을 들어 올렸다.“짠 하자.”“넵!”민희는 잔을 세게 부딪치고는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고개를 돌리고 호기롭게 소맥을 벌컥벌...
서상조시인·소설가 지난호에 이어 인맥을 과시하듯 오히려 표정이 당당해 보이는 유 목사는 “제가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냥 일기를 적듯이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선임자는 서류를 찬찬히 넘겨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일련번호에 따라 내용이 아주 꼼꼼하게 적혀 있군. 골프채는 아예 별도로 정리가 되어 있구먼. 이 내용이 진실이라면 나라가 완전히 뒤집어지겠어. 이건 보험을 든 게 아니라 독약을 준비한 것과 같은 상황이군.”“자, 목사님을 안전하게 모시도록 해. 나는 좀 더 둘러보고 나갈게.”말이 ...
서상조(시인·소설가) 지난호에 이어“저 혼자 있으니까, 구석구석 다 보고 가세요. 두 번 걸음 안 하시게요.”신 선생의 능청에 경찰은 더 맥이 빠지는지 대충 훑어보고는 돌아가는 것 같았다. 느린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다가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차량의 엔진 시동소리가 나더니 차츰 고요해졌다. “목사님, 이제 나가서 저녁이나 챙겨 드시죠? 최소한 오늘 밤은 넘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1층 거실로 내려온 두 사람에게 신 선생은 따뜻한 물을 한 잔씩 주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잔을 들고 온기를...
지난호에 이어 앞에서 언급했듯 박명덕은 달성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을 졸업한 공학박사이다. 동양미래대학교에서 정년 퇴임 후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일본 교토대학 외국인 초청학자와 서울시 문화재위원 및 한옥위원회 위원, 한국건축역사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조금도 그 정도(正道)에서 벗어남이 없이 외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명덕은 오롯하게 그 길을 걸었다. 굳이 간단하게 자서전이라 칭하고 나누어 보면 그만일 것을, 책의 제목에서 보듯 ‘화문집’이라 붙인 까닭이 거기에 있...
정아경(수필가) 지난호에 이어“엄마도 이제 샤넬 하나 가져도 되지 않나?” 딸의 말이 시작이었다. 딸의 그 말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수 십 년 단 하루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하고 자식 키운 나에게 그 정도의 보상은 충분하다는 당의를 부여했다. 당의성이 생기니 욕구가 일었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조금씩 종잣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여행모임에서 모인 돈의 일부를 현금으로 돌려주며 플렉스하자며 명분을 보태었다. 예상가격의 반이 모아지고, 나머지는 가족의 찬조와 카드 할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정아경(수필가) 오픈 두 시간 전, 백화점 입구를 뚫어져라보며 우회전을 하고 있다. 대여섯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음이 분주해졌다. 지하 4층에 주차를 하고 비상구 계단을 잰걸음으로 올라갔다. 백화점 정문 앞에는 굵은 철문이 내려져 있지만 입구 구석진 곳에는 가느다란 줄이 길어지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나보다 한 걸음 먼저 도착했다. 그녀 다음이 내 순서다.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열 번째는 되는 것 같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젊은 엄마 둘이 아기 두 명을 데리고 나의 오른쪽에 다음 자리를 잡았다....
우 종 율(수필가) 지난호에 이어눈앞에 지옥 같은 광경이 나타났다. 어린 것, 털 빠진 것, 눈에 진물이 흐르는 것 등 수십 마리의 고양이와 한 곳에는 치장한 옷조차 벗지 않은 애완견부터 숨을 헐떡거리는 늙은 도사견까지 우리에 갇혀 있었다.‘저기 갇히면, 내 아이들이…….’특히 막내는 남의 말에 졸졸 잘 따라다니기도 해서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우리가 왜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 홀대 받아야 한단 말인가.아들, 손자, 며느리, 떼로 몰려가 채소밭을 망가뜨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사람들처럼 앙숙들끼리 모여 악다구니를 부리며 편 ...
박진경일러스트, 웹툰 작가 지난호에 이어내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해지자, 어저씨는 어쩐지 내 눈치를 보는 듯 하더니 내던지듯 말했다. “모친이 찾고 계시는 것이냐?”“그럴 걸요, 아마도.”“네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냐?”“당연하죠.”“허나 나는 방법을 모른다. 너는 이런 물건을 만든 너희 시대의 기술로 인해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냐?”“근데요, 저더러 자꾸 미래에서 왔다고 하시는데 지금도 통신사 신호가 잡히거든요?”“아까부터 통신사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전화 신호 보내 주는 곳이요.”“왜 없어요? 통신...
정아경(수필가) 금지된 공간, 금지된 시간, 금지된 시선 …… 그녀는 지금 ‘금지’라는 벽 앞에 서서 자유를 꿈꾼다. 아무도 그녀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 스스로 구속했을 뿐이었다. 그래야만 한다고, 그러면 다들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탓일 것이다. 마치 도덕교과서를 실천하듯 제1과를 이행하고 나면 다음엔 2과, 3과를 펼쳤다. 세월은 흘렀다. 세상도 변하고 그녀도 변해갔다. 자신을 옥죄었던 굴레들이 하나씩 가면을 벗고 진실의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그녀는 아연실색했다. 그것은 배신감이었다. 사람에 대한 배신, ...
万 折(문필가) 고향 얘기는 언제 해도 어머니 품속 같이 따뜻하고 푸근하다. 시대는 이른바 ‘글로벌’이고 지구촌 시대이니 고향이라는 한정된 관념에 메이는 것이 시대적 오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고전적 의미의 순정(純正)함은 변치 않으리라.사실 나는 행정상으로만 성주이지 고령이 성주 못지않은 고향이다.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언젠가 얘기했듯 어릴 때부터 5일장 고령장을 드나들었으니 ‘고령’ 글자만 봐도 고향생각이 떠오른다. 더구나 50여 년 전부터 고향 땅을 떠나 타지생활을 하다 보니 때로는 아련한 감회도 있었다.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