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청수시인 부처 아닌 게 없더라 천년 고목에 보름 달빛이 촛불처럼 걸렸습니다산문(山門)에 들어 묵언하며 지낸 지도 달포가 지나가고그렇게 겨울의 끝자락에서 다시 새봄을 만났습니다산새 노랫소리에 새벽 아침을 열고 솔숲에 들면세상에 다 들어내 놓고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삼십년 세월의 보따리를 풀어계곡물에 철철 흘려보냈습니다산길에서 만나는 모든 풀잎과 부처 아닌 게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곽호영시인 고혹적인 자태로진한 향 풍기는 아까시아꽃 촉촉한 피부가애기 궁뎅이처럼 탱탱하다 새하얀 옷깃 속뇌쇄적인 몸매는일벌조차 향락으로 빠트린다 봄이 지나간다 아까시 향 뿌리며또,이렇게한 봄이 지나간다
춘강 이종갑시인·시조시인 조용한 봄날이었지.당신의 그때 그 눈 속엔욕망의 슬픈 눈빛이 별빛처럼 빛났습니다.그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지만,차가운 겨울밤에도 별처럼 빛났습니다.까만 조약돌이 그저 반짝이는 줄로만 알았습니다.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욕망이 회오리로 일렁이던 그 눈빛.그것이 추억일까… 아픔일까…푸르던 그 입술의 풍경을 깨트리지 못해눈자위 검은 가로등으로 서 있어야만 했던물속에 달의 깊이를 가르쳐 주던 그대여.풍진세상의 걸레가 되어 구름을 밟노라면갈잎에 걸린 바람처럼 한없이 뜨겁습니다.허공에 걸린 저 눈빛…….새들이 ...
곽도경시인, 화가 반구대 암각화에서 나온고래 한 마리사람을 사랑하였다고 하네 고래가 사랑한 여자가고래를 낳고, 사람을 낳고고래와 사람은 애초에 한 혈육 어쩌면 내 전생은고래가 사랑한 여자고래를 낳은 여자 새끼를 낳은 지 서른 해가 넘도록등에 업고 내려놓지 못하는미련하고 어설픈 어미
이전에는 향우회 모임에도 나가서 고향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나누기도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과 이런저런 핑계로 요즘은 자주 나가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타향객지 생활을 수십 년 하다보면 그래도 언젠가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친구도 고향 친구가 제일 좋더라는 얘기를 하게 되는데 정말이지 백 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태어난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 연어가 바다로 나아가서 몇 년을 잘 살다가도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진금선동시인, 스토리텔링 동화 연구가 아끼는 인형자꾸만 봐도 예쁘다웃지도 움직이지도 않지만옆에 딱 달라붙은 귀여운 껌딱지다머리 빗겨주고 옷 입혀주고맛있는 것도 먹인다 엄마가 아빠 인형이라면아빠가 엄마 인형이라면호랑이가 되진 않을 텐데 내가 언니 인형이라면나랑 잘 놀아줄 텐데 우리 집이 인형의 집이라면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엄마가 해주는 떡볶이 냄새처럼온 방안을 떠다닐 텐데
배 연수필가, 화가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또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거나 정답게 느끼는 곳이라고 되어있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어서 그리움이 타향에서 곧장 찾아갈 수 없어서 안타까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면서일정한 형태로 나에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라고도 한다. 그리고 고향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람 외에 산천이라는 자연도 포함되기에 고향산천이라고 한다. 생물학적 탄생과 일치시켜 어머니와 같이 보기도 한다.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어머니가 아닌가 싶다. ...
이용수시인, 예비역 육군 소장 나는 거북이,저 높은 언덕을 향하여토끼와 경주를 하고 있다오. 토끼가 얼마나 빠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지만요 나는 우승한다는 꿈보다더 소중한 꿈을 갖고 있다오. ‘저 언덕을 오른다는 꿈’ 그 꿈이 있기에나는 모든 것이힘들지 않다오.
김상룡수필가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는 광활한 우주에 있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한 번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때가 있다.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가는 거지’ 옛적 할배 곰방대 같은 소리지만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답이 될 수도 있다. 죽음에 이르러 21그램 무게의 영혼이 자기 별로 향한 우주여행이 시작된다는 거,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지난달 우리나라 남쪽 바다 끝에선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트랜스포터에 실려 이송되고 있었다. 우주로 나아가야겠다는 온 국민의 열망이 ...
춘강 이종갑시인·시조시인 당 신 바람이 아니었다. 침묵을 깨는 것은 조그만 너 안의 까만 포도알이었어. 한없이 차고 따뜻한…….
정아경 수필가 제주도는 먼 이국의 땅이었다. 대한민국 지도를 그릴 때 가장 마지막에 그리던 제주도는 멀고도 먼 곳이었다. 내가 서 있는 땅의 모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셨던 것도 같고, 토끼를 닮았다고 하셨던 것도 같다. 선생님의 일방적 주입식 수업이었지만 내 고장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회 시간이 즐거웠다. 사회과부도를 닳도록 펼쳐가며 각 지역의 좌표를 찾는 것은 재미있었다. 육지에서 뚝 떨어진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남도 끝의 제주도는 지도에서도 멀었고, 그만...
주설자시인 흰 뼈마저도 흙이 되는 까마득한 세월 발굴의 솔질에 다시 깨어난다 살다가 묻힌 자는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지 백골로 누워 있다가 가지런한 잇바디 다물지 못한 채 할 말이 있다고 푹 꺼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대가야의 바람이 스쳐가고 불현 듯 그날의 울고 웃는 소리도 저 언덕 너머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오래 삭으면 고요가 되는가 오로지 기나긴 침묵만이 가야인들의 무덤을 감도는데 문득 우륵이 켜는 가야금 소리에 풀잎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