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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4)

기사입력 2023.02.0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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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견모주 음악분수대,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내.JPG

    정견모주 음악분수대,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내

     

    ◆ 김사문(金士文)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낸 무(畝)와 전서(典書)를 지낸 복상(復常)의 딸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벼슬에 나아가 태종 9년(1409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재임 중 태종비(太宗妃)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인 민무구(閔無咎) 형제와 권문세가(權門勢家)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방자(放恣)함을 직간(直諫)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유배(流配)되었다.
    태종 17년(1417년) 사헌부(司憲府) 지사(知事)를 거쳐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냈다. 퇴관(退官)하고 충주(忠州)에 머무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에 정착하여 고령김씨 집의공파(執義公派) 파조(派祖)가 되었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 장등(長嶝) 임좌(壬坐)에 합폄(合窆)이다. 묘갈명은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이 찬(撰)했다. 배위는 직제(直提) 학정(學靖)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영산신씨(靈山辛氏)이다.
    ※ 참고문헌 : 태종실록,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고령대관1959년)

     

    ◆ 김사신(金士信)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성오(聖五)이다.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낸 무(畝)와 전서(典書)를 지낸 복상(復常)의 딸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세종 11년(1429년)에 사마시(司馬試)에 등과한 후 세종 때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고령김씨 군수공파(郡守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묘소는 성주군 서면 축좌(丑坐)이었으나 실전(失傳)했다.
    1964년 후손들이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신덕동(新德洞) 원(原0에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하고 있다. 배위는 승지(承旨) 경춘(景春)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이다.
    ※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사충(金士忠)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성륜(聖侖)이고 호는 선와(仙窩)이다. 맹문(孟文)으로 개명했다.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낸 무(畝)와 전서(典書)를 지낸 복상(復常)의 딸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세종 때 인수부(仁壽府:동궁의 관아인 세자부(世子府)의 부승(副丞)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세조의 혼정(昏政)에 퇴관하여 영천 신령현(新寧縣) 선관(仙館)에 은거하니 후손들이 세가하게 되었다.
    공은 고령김씨 승지공파(承旨公派) 파조(派祖)가 된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 산157번지 동화능계서원촌(東和陵溪書院村) 대동(大洞) 해좌(亥坐)에 있다. 배위는 홍묘(弘卯)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합천신씨(陜川申氏)이며 합폄(合窆)이다.
    ※ 참고문헌 : 세종실록,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고령군지(1996년)

     

    ◆ 김사행(金士行)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이성(彛性)이다.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낸 무(畝)와 전서(典書)를 지낸 복상(復常)의 딸인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세종 8년(1426년) 여산현감(礪山縣監)에 제수되어 선정하니 군인송덕시(郡人頌德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位官惟正直(위관유정직)
    벼슬에 임해서는 오직 정직했고
    修德致柔嘉(수덕치유가)
    덕을 닦음에 부드럽고 아름다웠네
    淸白遺傳世(청백유전세)
    청백은 남아 세상에 전하니
    風聲樹不磨(풍성수불마)
    세운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네

    그 후에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내고 퇴관하고 처향인 논산 노성(魯城) 신양촌(新陽村)에 터전을 잡아 그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공주시 탄천면 광명리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참판(參判)을 지낸 정(靖)의 무남독녀이며 숙부인(淑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로 묘소는 논산시 은진면 가야곡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고 있다.
    ※ 참고문헌 : 여지도서(與地圖書) 니산현 인물조, 세종실록,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 김삼수(金杉壽)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지낸 형(瀅)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생졸년 미상이나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매제(妹弟) 설계(雪溪) 문려(文勵)가 명종 및 선조 때 사이의 인물로 추정된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국조방목, 경주김씨 수은공파내 참봉공파보(정유보)

     

    ◆ 김상직(金相稷)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주로(周老)이고 호는 가정(佳亭)이다. 삼외헌(三畏軒) 경철(敬喆)과 극복(克復)의 딸인 벽진이씨(碧珍李氏) 사이에 정조 3년(1779년) 태어났다. 순조 19년(1819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병조참의(兵曹參議) 겸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향림정(香林亭)의 중건기문(重建記文)을 지었다. 철종 2년(1851년) 11월 9일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가곡(佳谷) 용당동(龍塘洞) 우륵(于勒) 증조고(曾祖考) 묘하(墓下) 계좌(癸坐)에 있다. 유고(遺稿)가 있으며 배위는 규상(奎祥)의 딸인 숙부인(淑夫人)여강이씨(驪江李氏)이다.

     

    ◆ 김선영(金善英)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술이(述而)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김극창(金克昌)의 아들로 선조 38년(1605년) 태어났다. 인조 14년(1636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內職)으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 예조좌랑(禮曹佐郞) 겸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 세자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 통예원(通禮院) 봉예(奉禮)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 차관접반관(差官接伴官)을 역임했다.
    그리고 외직으로 고성현령(固城縣令), 무안현감(務安縣監), 흥해군수(興海郡守), 풍기군수(豊基郡守), 함안군수(咸安郡守), 안주판관(安州判官), 청송부사(靑松府使) 등을 지냈다. 숙종 2년(1676년) 향년 72세로 졸했다.
    ※ 참고문헌 : 국조사마방목, 병자별시 문무과 방목(丙子別時文武科榜目)

     

    ◆ 김성률(金聲律)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이해(而諧)이다. 승사랑 호조정랑을 지낸 몽령(夢齡)과 진사 익형(益亨)의 딸인 의인(宜人) 남평문씨 사이에서 명종 21년(1566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조 36년(1603년) 계묘(癸卯)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한 후 어모장군의 품계를 받았으며, 임치도진관(臨淄島鎭管), 금모포 만호(萬戶)와 훈련원 판사를 지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현손이다. 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수거동(叟居洞) 묘좌에 있다. 배위는 첨지 언임(彦任)의 딸인 숙인 고령박씨이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 화왕산입성(火旺山入城)을 방어했던 경상도 열읍의사(列邑義士)들의 명단인 ‘화왕산성동고록火旺山城同苦錄(화왕산성동고록)’에 공과 둘째 동생인 김성철(金聲徹)이 함께 했던 기록이 있다. 대구광역시 망우당공원 내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돼 있다.
    ※ 참고문헌 :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 계묘춘별시방(癸卯春別試榜),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文忠公派) 세보(기축보)

     

    ◆ 김세문(金世文)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덕장(德章)이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낸 탁(鐸)과 수해(壽海)의 딸인 정부인 초계정씨(草溪鄭氏) 사이에서 중종 15년(1520년)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철산군수(鐵山郡守)로 재직 시에 강명(剛明)하여 선정이 있었으니 체직되어 올 때 승진시키라는 평안도 어서 김덕룡(金德龍)의 단자(單子)를 정원에 내렸다는 기록이 명종 12년(1557년) 2월 17일 명종실록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강직하고 청렴한 관직생활을 했다.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로 재임 중 선조 2년(1569년) 5월 16일 임소(任所)에서 졸했다.
    아들 면(沔)의 공적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동 조고 묘후 유좌에 함폄이다. 배위는 예빈시(禮賓寺) 판관을 지낸 중손(仲孫)의 딸인 정경부인 김해김씨이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 고령대관(1959년), 송암 김면의 생애와 의병활동 ,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수(金銖)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우경(禹卿)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장생과 훈련참군 승주의 딸인 정부인 가수노씨(嘉樹魯氏) 사이에서 성종 7년(1476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5년(1510년)무과에 등제한 후 고성(固城), 진주(晉州), 진도(珍島)의 군재(郡宰)를 거쳐 통훈대부 순천진관과 진주판관을 지냈다. 자(子) 수문(秀文)의 귀(貴)로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증직 받았다.
    공은 고령김씨 판서공파 파조이다. 명종 14년(1559년) 2월 2일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산 23번지 10 칠동 신좌에 있다. 배위는 정부인 강양이씨(江陽李氏)이고 합폄이다.
    ※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수(金洙)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성원(聖源)이다. 강진현감을 지낸 충서(忠瑞)와 통임랑(通任郞) 응복(應福)의 딸인 숙인 청주한씨(淸州韓氏)사이에서 명종 17년(1562년)4월 21일 태어났다.
    조봉대부(朝奉大夫) 군자감(軍資監) 주부를 지냈다. 1623년 6월 22일 향년 62세로 졸했다. 배위는 열(烈)의 딸인 숙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묘소는 합천군 덕곡면 율원촌후(栗院村後) 선고 동하(仝下) 자좌 쌍분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경주김씨 스은공파 내 참봉공파(정유보)

     

    ◆ 김수옹(金守雍)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경화(景和)이고 호는 기재이다. 성균생원을 지낸 공(珙)과 진사 훤의 딸인 진양정씨(晋陽鄭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중종 8년(1513년) 3월 17일 고령군 대가야읍 월기촌에서 태어났다. 한번은 남명 조식선생께거 지나다 들러 기이하게 여겨 생원공이 이 아이는 반드시 넓은 기량을 가진 인재(人才)기 될 것이라고 일컬었다. 중종 31년(1536년) 아버지를 뵈러 한양에 갔는데 마침 별시과거가 있어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를 보아 문과에 급제했다. 그때 나이가 24살이었다. 이로부터 명성이 시골과 서울에 알려졌다.
    뒤이어 동생 둔와(遯窩) 내옹(乃翁)도 31세 되던 해 중종 38년(1543년) 계묘(癸卯)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연서찰방(延曙察訪), 평안도 평사(評事), 예안현감(禮安縣監), 경상도 도사(都事)를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그가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던 사실이 중종실록 97권, 98권에 기록된 바 이를 약술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중종 35년(1540년ㅇ) 경자년 9월 예안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중종 37년(1542년) 1ㄹ월 12일 지경(地境)이 궁벽하고 호수가 274호에 지나지 않는데 예안현이 타 지역 대비 부당한 신역(身役)과 조세 등의 부과로 피폐해진 사정을 아뢰고, 지경이 궁벽하고 백성이 적은 폐단, 수군을 대신 정하는 폐단, 전곡(錢穀)을 헛되이 소모하는 폐단, 수량 이외의 양두(羊頭)로 인한 폐단, 기인을 준례에 따라 배정하는 폐해 등 그 적폐의 시정을 요구하는 5조목의 상소문을 올려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상주(上奏)하여 경장(更張)하여 줄 것을 호소했다.
    애민정신으로 다스리니 관인과 백성들이 그를 추종했다. 1543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 소윤이 형조판서 윤임과 이조판서 등 대윤을 죽이고 회재(晦齋) 이언적 등 명사를 내쫓았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때부터 더 이상 벼슬자리애 머물러 있을 마음이 없어 갓끈을 만지며 명종 1년(1545년) 가을 벼슬에서 물러나 합천의 숭산(崇山)에 들어갔다.
    힌훤당 김굉필과 일부 정여창을 추모해 지동암(志同岩) 밑에 허물어진 두 선생의 강학지소(講學之所)를 중수하고 삼수정이라는 학당을 짓고 경서를 가르침에 부근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여 들어 문풍(文風)이 진작되었다. 명종 3년(1548년) 고향으로 돌아와향림정(香林亭)을 창건해 강학지소(講學之所) 삼아 재주에 따라 가르쳤다.
    고령지역 최초로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의 4가지 덕목 중 실천가능한 10조를 엄선해 향약을 계를 만들어 규약을 세우고 생활화 하도록 힘껏 가르치니 몇해 만에 골짜기의 백성들이 생각과 생활이 변해 부지런하고 형제가 우애하며 부모를 사랑하고 이웃을 서로 도와 선을 장려하고 악을 규제하는 등 아름다운 생활 모습으로 변하니 향중이 모두 선생을 더욱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정리 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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