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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아웃

주간고령 편집부 2019-05-10 (금) 21:51 3개월전 40  


로그아웃 되었다. 깜깜하다는 건 정전되었을 때만 쓰는 말이 아니었다. 막막하다는 것 역시 길이 보이지 않을 때만 쓰는 말은 아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곁을 지켜주었고, 폭주하는 스케줄로 지칠 때는 고요한 음악으로 위로해 주었고, 아무도 연락을 해 오지 않는 날엔 다양한 영상으로 웃음을 주었던, 내 운동량을 기록해 주고, 중요한 미팅이나 기념일도 미리 알려주었던, 약속을 잡으며 일정을 검색하면 모임이 겹치는지 금방 알려주던 충실한 내 집사가 떠났다.
스쳐가는 문장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메모장이 저장해 주었고, 추억들은 갤러리에 고이 저장해 주었고, 잠꾸러기의 아침도 음악소리로 기분 좋게 깨워 주는 센스 만점의 스마트한 짝이었는데, 사십여 개월을 나와 찰싹 붙어 지내 온 녀석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었다. 늦은 밤에 일어난 일이다. 아무리 두들기고 흔들어 봐도 먹통이다.
오호통재라! 당장 내일 오전부터의 수업을 어쩌란 말이지? 나는 녀석에게 너무 많이 의지했다. 녀석이 저장한 기록 중에 나 혼자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당장 연락할 전화번호도 몰랐다. 녀석이 어떤 기미라도 보이거나 예고라도 해 줬다면 이렇게 당혹스럽진 않았을 것이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녀석은 너무나 완벽하게 나를 도와줬다. 게으름을 피운 적도 없었고 정보를 망각한 적도 없었다. 더러 실수를 했다면 내가 먼저 버릴 계획을 세우고 녀석에게 입력된 정보를 죄다 옮겨 놨을 것이다. 끝까지 가장 완벽한 포즈를 잃지 않은 녀석에게, 아닌 밤중에 한 방 먹었다. 오호통재라!
책 속의 선배들은 강조했다. 존재는 미미하다고……. 사라짐은 일순간에 일어난다고……. 문장으로 읽고 마음에만 새겼던 그 말들이 갑자기 기운차게 일어나 웅성거린다. 사라짐의 순간은 언제나 뜻밖의 찰라다. 나의 사라짐도 결국 그럴 것이다. 만남이란 만나고 있는 그 시간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이 사라진 뒤 가슴으로 들어오는 순간에야 만남은 이뤄진다. 내 짝지이며 동지였던 G3도 내 손을 떠나는 순간에서야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는 지인이 있다. 그녀는 자신만큼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하는 사람은 없다고 강변하곤 한다. 싹싹하고 여성스럽고 말솜씨까지 우아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 그녀는 이타적인 사람 같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 눈에는 그녀의 행동이 이기적인 깍쟁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시력의 문제였을 것이다. 최근 어떤 모임에서 그녀가 상량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비장미(?)를 덧칠하며 제법 묵직한 선언을 했다.
“이제 나도 이기적으로 살아야겠어!”
너무 착하게 살아서 항상 손해만 봤다고 덧붙였다. 헐, 정말? 일행 중 몇몇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나를 모른다. 내가 만나 온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알까? 사람마다 나에 대한 평가나 정의도 제각각일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몇은 좋아하고 몇은 실어하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것이라고 했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 어떤 형태로 타인의 가슴에 남을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게 불변의 진리임에도 공연히 그런 걸 상상하다가 지치고 지쳐 병만 얻게 된다. 내가 나를 알겠다고 덤비는 게 가장 실속 없고 무모한 도전이다. 이 밤 간간이 꺼내 보던 ‘나’라는 텍스트를 폐기 처분한다. 가상의 로그아웃! 아니 가장 현실적인 로그아웃!

다음 날 최신형 새 휴대폰을 샀다.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무수한 휴대폰 중 하나일 뿐이지만 내 손에 들어온 순간 이것은 내 것이 되었다. 내꺼라는 표시로 패셔너블한 케이스를 사서 입혔다. 충전기도 바꿨다. 새 휴대폰의 기능을 익히려 종일 조물조물 만지고 들여다보고 있다. 한동안 나와 동고동락할 새로운 동지와 아름다운 동행을 꿈꾸니 미미했던 존재가 태산처럼 커진다. 휴대폰과 나는, 우리는 시간의 향기를 맡고 공간의 향기를 담아 갈 것이다. 내가 풍기는 시간의 향기를 그도 맡을 것이고, 내가 담아내는 공간의 향기로 우리는 서로 익숙해질 것이다.
내 가슴속에 잠시 들어앉았던 짝지가 가벼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뿔사! 사라지기 전에 기록이라도 해 뒀어야 하는 건데. 덕분에 나에 대해서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나는 이기적이다.

 

수필가 정아경

 

작가 프로필

‘에세이스트’ 신인상
대구문인협회·북촌시사회 회원
에세이스트문학회 이사
에세이스트 문학평론상 수상
매원 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나에게 묻다’ ‘중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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